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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도체

칩이 국경을 만든다 — 보이지 않는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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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사회의 반도체 칩은 이제 국가 간 보이지 않는 전쟁의 무기가 되었다.

세계 최첨단 기술의 핵심 부품인 반도체는 경제와 안보 모두에 전략적 가치를 지닌다. 중국의 시진핑 주석이 "반도체는 사람의 심장과 같다"고 비유했을 정도로 각국은 칩 확보에 사활을 건 상황이다.

보이지 않는 전쟁 속에서 미국과 중국을 중심으로 글로벌 공급망이 재편되고 있으며,
한국·일본·대만 등 반도체 강국들도 서로 엇갈린 전략과 동맹으로 이 첨단 기술 패권 경쟁에 뛰어들고 있다.

미국: 패권 수성을 위한 전방위 투자와 동맹

세계 반도체 산업의 태동지를 자처하는 미국은 한때 압도적이던 제조능력이 축소되며 위기감을 느끼고 있다.

실제로 미국 기업들은 전 세계 반도체 설계(팹리스) 분야 매출의 46%를 차지하지만, 제조 분야 점유율은 12%에 불과해 불균형이 심화되었다.

이를 타개하고자 미 정부는 2022년 약 52조 원 규모의 반도체와 과학법(CHIPS Act)을 통과시켜 2032년까지 자국 제조 역량을 200% 성장시키겠다는 계획을 가동했다.

법안 효과로 4,500억 달러 이상의 민간투자가 쏟아져 25개 주에서 83개의 반도체 프로젝트가 진행 중이지만,
중국의 도전과 공급망 불안 등 위기 의식은 여전하다.

미국은 동맹과의 협력 또한 강화하고 있다.

안보와 기술 측면에서 한국·대만·일본과의 긴밀한 공조를 추진하여,
동아시아 공급망에 대한 과도한 의존을 완화하고 첨단 기술 혁신을 촉진하려는 것이다.

실제로 엔비디아같은 미국 기업의 최첨단 GPU의 90% 이상이 대만에서 생산되는 현실은,
대만을 포함한 동맹국과의 협력이 미국 전략에 필수적임을 보여준다.

한편으로 미국은 중국의 첨단 반도체 접근을 차단하기 위해 수출 규제 카드를 사용하며,
동맹국에도 대중 수출 통제를 압박하고 있다.

이러한 기술 봉쇄 전략은 중국 기업의 발전을 늦추고자 하는 미국의 패권 수성 전술로 평가된다.

중국: 기술 굴기와 자립의 도전

중국은 세계 최대의 제조대국답게 반도체 분야에서도 자급자족을 목표로 한 기술 굴기 전략을 펼쳐왔다.

2014년 반도체를 국가전략산업으로 지정하고 대규모 국가 반도체 펀드를 조성한 중국 정부는,
2025년까지 칩 자급률 70%를 달성하겠다는 야심 찬 목표를 내걸었다.

그러나 현실은 녹록치 않다.

현재 중국의 자체 칩 공급 능력은 20% 남짓에 불과하며,
2026년에도 21% 수준에 머물 것이라는 전망이 나올 정도로 목표 달성이 요원하다.

이는 첨단 장비 기술의 부족과 미국의 제재로 EUV 노광장비 등 핵심 기술에 접근하지 못하는 한계에서 기인한다.

중국 반도체 산업의 대외 의존도도 약점으로 지적된다.

중국은 자국 수요의 66%에 달하는 반도체를 대만(36%), 한국(20%), 일본(6%), 미국(4%)에서 수입하며,
연간 3천억 달러에 육박하는 무역적자를 보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미국의 첨단 반도체 제재는 중국의 고급 칩 생산 역량 강화를 크게 가로막고 있다.

그 결과 중국은 당분간 최첨단 분야에서는 어려움을 겪겠지만,
한편으로 성숙 기술 기반의 범용 반도체 생산에서는 이미 세계 허브로서 확고한 지위를 구축했다.

앞으로 글로벌 공급망은 미국과 동맹국이 이끄는 첨단 공급망과,
중국을 중심으로 한 범용 기술 공급망의 이원화로 양분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요컨대 중국은 값싼 인건비와 막대한 내수시장, 정부 지원을 바탕으로 중저가 칩 생산에 강점을 살리며 점유율을 넓혀갈 것으로 보인다.

한국: 메모리 강자의 외줄타기 외교

한국(대한민국)은 반도체 분야에서 메모리 강국으로서 독보적 위상을 갖고 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두 기업이 전 세계 D램 시장의 약 70%를 공급할 만큼 메모리 분야에서 막강한 경쟁력을 보유하고 있다.

이러한 기술력 덕분에 한국은 메모리 반도체 분야 세계 1위 지위를 누리고,
일부 파운드리(위탁생산)와 시스템반도체 설계에서도 존재감을 키우고 있다.

다만 비메모리(시스템) 분야에서는 미국, 대만 등에 비해 취약한 편이어서,
삼성전자를 중심으로 첨단 파운드리 투자와 설계능력 강화 노력이 계속되고 있다.

국제관계 측면에서 한국의 입지는 미묘하다.

한국 반도체 산업은 핵심 장비와 설계 소프트웨어를 미국에 의존하고 있어 미국 기업과의 협력이 필수적이다.

동시에 중국은 한국산 반도체의 최대 수출시장으로,
한국으로선 미국 제재 범위를 넘지 않는 선에서 중국과의 거래를 유지해야 하는 현실이다.

이처럼 한국은 미·중 사이에서 안보 동맹과 경제 파트너십 사이 균형을 잡는 외줄타기를 하고 있다.

최근 미국이 주도하는 ‘칩4 동맹’에도 한국은 참여해 동맹 내 입지를 다지는 한편,
중국 시장과의 완전 단절은 피하려는 전략을 취하고 있다.

이러한 중층적 전략 속에서 한국은 향후에도 메모리 분야의 우위를 지키며,
첨단 분야에서는 동맹 협력을 통해 기술 추격을 모색할 전망이다.

일본: 반도체 강국의 부활을 꿈꾸며

한때 1980년대까지 세계 메모리 시장을 석권했던 일본은 이후 잃어버린 30년을 보내며 반도체 위상이 크게 축소되었다.

그러나 최근 일본은 재도약을 위한 국가 차원의 투자를 아끼지 않고 있다.

일본 정부와 소니·도요타 등 8개 대기업이 손잡고 2022년 설립한 신생 파운드리 회사 라피더스(Rapidus)는 그 상징이다.

5조 엔 규모로 추산되는 이 프로젝트는 2027년까지 2나노미터(nm)급 최첨단 로직 반도체를 양산한다는 목표로,
미국 IBM 및 벨기에 IMEC 등과 기술 협력을 맺었다.

최근 홋카이도 치토세에 첫 공장 기공식을 연 라피더스는 일본의 반도체 부활 실험이라 불리며,
성공 여부와 무관하게 글로벌 공급망 지형에 적잖은 영향을 미칠 것으로 기대된다.

라피더스 프로젝트는 동시에 동맹국 산업 블록 형성의 일환으로도 해석된다.

일본 정부의 전폭적 지원 아래 IBM과의 협력을 맺은 것은,
대만 TSMC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기 위한 미국-일본-유럽 연대의 단면을 보여준다.

실제 미국의 대중국 수출 규제에 동참한 일본은 첨단 노광장비 수출을 제한하고,
미국·유럽과 함께 중국 견제에 나선 상태다.

일본은 또한 소재·장비 분야에서 강점을 살려 한국과 함께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의 균형추 역할을 담당하고 있으며,
국제반도체장비재료협회(SEMI)와 협력해 차세대 인재 양성에도 힘쓰고 있다.

물론 일본의 부활에는 넘어야 할 산도 많다.

인재 부족과 투자 비용 문제로 라피더스의 성공을 장담할 수 없으며,
과거처럼 시장을 석권하려면 여전히 기술 격차를 좁혀야 한다.

그럼에도 일본은 정책적 의지를 바탕으로 반도체 강국의 지위를 되찾기 위해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대만: TSMC와 실리콘 방패의 역설

대만은 작은 섬나라에 불과하지만, 전 세계 최첨단 반도체 생산의 심장부다.

세계 1위 파운드리 기업 TSMC를 보유한 대만은 첨단 로직 반도체 시장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실제 2023년 기준 첨단 로직 칩 생산에서 대만이 차지하는 비중은 약 54%로 미국(12%)이나 한국(18%)을 압도한다.

애플·엔비디아 등 미국 빅테크의 최신 프로세서도 대부분 TSMC의 대만 공장에서 생산되고 있으며,
이로 인해 대만은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의 요충지로 군림한다.

이 같은 대만의 기술력은 ‘실리콘 방패’라는 독특한 개념으로 이어졌다.

대만 국민들은 TSMC를 호국신산(護國神山), 즉 나라를 지켜주는 신령한 산이라 부르며
중국의 침공을 억제하는 방패로 여기고 있다.

전 세계가 대만의 첨단 칩에 의존하는 현실 자체가 안보 자산이 된 셈이다.

그러나 최근 대만 내부에서도 실리콘 방패의 역설이 거론된다.

미국이 자국 내 TSMC 공장 유치를 압박하고,
일본 등 다른 나라에서도 대만 생산능력을 분산하려는 움직임이 커지자,
정작 대만의 전략적 가치는 약화될 수 있다는 우려다.

대만 정부는 “실리콘 방패를 함부로 훼손할 수 없다”며 TSMC의 해외 이전을 신중히 통제하고 있다.

궁극적으로 대만의 생존 전략은 최첨단 기술 우위 유지와 공급망 핵심 지위를 지키는 데 있다.

중국과의 정치적 긴장이 계속되는 가운데,
대만은 세계가 자국 반도체 없이는 안 돌아가도록 만드는 실리콘 생명줄을 움켜쥠으로써 자신을 보호하고 있는 것이다.

글로벌 반도체 패권의 향방

다섯 나라가 벌이는 칩의 전쟁은 총성 없는 전투이지만 그 파급력은 실로 거대하다.

미국과 중국의 경쟁은 반도체 공급망을 첨단 vs 범용의 두 개 블록으로 재편하고 있고,
한국·일본·대만은 저마다의 강점을 지렛대로 삼아 이 흐름 속에 자리매김하고 있다.

앞으로 글로벌 반도체 패권은 당분간 미국과 동맹국들이 주도하는 첨단 기술 네트워크 대
중국을 중심으로 한 가격 경쟁력 네트워크의 이중 구조로 굳어질 가능성이 높다.

특히 한국과 대만은 첨단 공급망에서 역할이 한층 강화되어 기술적 중요성이 커지고,
중국은 막대한 내수 시장을 바탕으로 범용 칩 생산에서 영향력을 지속 확대할 전망이다.

그러나 반도체 생태계는 그 어떤 나라도 혼자 구축할 수 없는 복잡한 연결망이다.

미국의 견제에도 중국은 완전히 배제할 수 없는 생산 허브이며,
일본·한국 등 동맹도 상호 협력이 필수적이다.

궁극적으로 첨단 기술의 미래는 적대적 경쟁 속에서도 부분적 협력이 불가피한 다극 체제로 나아갈 것이라는 견해도 나온다.

칩이 만든 국경선 위에서 각국은 치열한 각축을 벌이고 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국경을 넘어 협력의 다리를 놓아야만 반도체라는 거대한 시대의 심장을 함께 뛰게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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