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시대를 맞아 반도체는 이제 특정 기술기업의 전유물이 아니라, 국가의 미래를 좌우하는 전략 산업이 되었다.
그동안 미국·한국·대만이 주도해온 글로벌 공급망에 이제 중동과 동남아의 신흥국들이 본격적으로 도전장을 던지고 있다.
사우디아라비아, 아랍에미리트(UAE), 이스라엘, 그리고 베트남은 각기 다른 이유와 목표로 반도체 산업에 뛰어들며 새로운 지형을 그리고 있다.
이들의 공통점은 “에너지나 인력 같은 기존의 강점을 기술로 전환하려는 국가적 시도”라는 점이다.
사우디아라비아: ‘비전 2030’이 그리는 칩 산업의 미래
세계 최대 산유국 사우디아라비아는 석유 의존 구조에서 벗어나기 위해 ‘비전 2030’을 중심으로 산업 다각화를 추진 중이다.
이 계획의 핵심에는 의외로 “반도체”가 있다. 정부는 2024년 “국가 반도체 허브(National Semiconductor Hub)”를 출범시키며, 2030년까지 최소 50개의 팹리스(설계 중심) 기업을 육성하겠다고 선언했다.
사우디는 이미 10억 리얄 규모의 딥테크 벤처펀드를 조성했고, 국부펀드(PIF)는 알랏(Alat) 프로젝트에 1,000억 달러를 투입해 반도체 인프라 구축에 나섰다.
사우디의 반도체 전략은 명확하다.
“석유에서 기술로, 원자재에서 설계로”의 전환이다.
정부는 리야드에 글로벌 팹리스 기업을 유치하고, 해외 엔지니어에게 장기 거주 비자를 제공해 인재 생태계를 조성하고 있다.
미국 AI 반도체 스타트업 에지코틱스(EdgeCortix)와 크네론(Kneron)이 이미 사우디에 진출해 연구개발을 진행 중이다.
흥미로운 점은 사우디가 미국과 대만을 주요 기술 파트너로 삼으면서도, 중국과의 경제협력은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미·중 사이에서 기술 이전과 장비 도입 문제를 조율하며 ‘균형 외교’를 펼치는 모습은, 사우디가 단순한 투자처가 아니라 ‘새로운 기술 중립지대’를 자처한다는 의미다.
다만, 인프라와 인력의 부족은 여전히 숙제다.
막대한 자본에도 불구하고 숙련된 공정 엔지니어와 반도체용 담수 인프라가 부족해 실제 생산까지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우디의 반도체 드라이브는 분명히 현실화되고 있다.
이 나라는 “오일머니에서 칩머니로”의 전환을 가장 과감하게 시도하고 있다.
아랍에미리트: 글로벌파운드리에서 AI 칩 허브로
UAE는 이미 15년 전부터 반도체 산업을 전략적으로 바라봤다.
2009년, 아부다비의 국부펀드 무바달라(Mubadala)가 AMD의 제조 부문을 인수해 설립한 글로벌파운드리(GlobalFoundries)는 지금도 세계 4위 파운드리로 꼽힌다.
UAE는 이 투자를 통해 “돈으로 기술을 배우는 법”을 익혔다.
최근 UAE는 한 발 더 나아가, AI 반도체를 새로운 성장 축으로 삼고 있다.
무바달라와 AI 전문기업 G42가 합작해 세운 MGX는 AI 인프라·반도체·데이터센터에 초점을 맞춘 투자회사를 출범시켰다.
이들은 AI 연산에 최적화된 반도체 칩, 즉 ‘AI 칩’ 생태계의 허브가 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현재 UAE는 엔비디아·AMD·세레브라스 등과 협력해 초대형 AI 데이터센터 캠퍼스를 건설 중이다.
아부다비에는 미국식 클라우드 인프라를 모델로 한 연구단지가 들어서고 있으며, TSMC의 현지 팹 설립 검토 소식까지 전해지며 국제적 관심이 쏠리고 있다.
이 모든 프로젝트의 배경에는 “오일머니의 기술 재투자”라는 국가 철학이 있다.
다만, UAE의 반도체 산업은 아직 자체 생산 기반이 약하다.
공장은 대부분 해외에 있고, 국내 기술인력도 제한적이다.
그럼에도 UAE는 개방적인 이민 정책과 고소득 인센티브를 통해 해외 기술자들을 적극 유치하고 있다.
안보적으로는 비교적 안정적이지만, 중동 내 갈등이 언제든 리스크로 작용할 수 있다.
UAE는 이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기술 강국으로 인정받는 아랍 국가”라는 상징적 목표를 놓지 않고 있다.
이스라엘: 스타트업 네이션의 실리콘 드라이브
이스라엘은 반도체를 “국가 전략 산업”으로 공식 규정하지는 않았지만, 실질적으로는 ‘반도체 강국’으로 평가받는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이스라엘의 기술 인프라는 군사 연구와 스타트업 문화 위에서 성장했기 때문이다.
1970년대 인텔이 처음 개발센터를 세운 이후, 이스라엘은 글로벌 기업들의 R&D 거점으로 자리잡았다.
현재 인텔은 이스라엘 남부 키르야트갓(Kiryat Gat)에 250억 달러를 투자해 첨단 공장을 짓고 있다.
정부는 이에 대해 32억 달러의 보조금을 지원했고, 세율도 5%까지 낮춰줬다.
이 공장은 2027년 가동을 목표로 하며, 이스라엘 역사상 최대 규모의 외국인 투자가 될 전망이다.
또한 자율주행 반도체 기업 모빌아이(Mobileye), 데이터센터 반도체 기업 멜라녹스(Mellanox) 등 이스라엘 출신 유니콘들이 인텔·엔비디아에 인수되며 글로벌 반도체 시장에 이스라엘의 존재감을 각인시켰다.
이스라엘의 강점은 ‘설계력과 혁신력’이다.
전 세계 팹리스 기업들이 이스라엘 엔지니어를 핵심 인력으로 채용하고 있으며, 애플·퀄컴·엔비디아·브로드컴 등도 현지 설계센터를 운영 중이다.
사실상 이스라엘은 “중동의 반도체 두뇌”로 기능하고 있다.
하지만 지정학적 리스크는 여전히 크다.
가자지구 인근의 군사 충돌은 인텔 공장 운영에도 잠재적 불안을 주고 있고, 정치적 갈등으로 인한 인재 유출 우려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로벌 기업들은 이스라엘을 떠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정부의 일관된 기술 인센티브 정책과 탁월한 엔지니어 인재풀 덕분이다.
결국 이스라엘은 “작지만 강한 설계 강국”으로서, 중동의 실리콘밸리를 현실로 만들어가고 있다.
베트남: 아시아의 새로운 반도체 생산 허브를 꿈꾸며
베트남은 반도체 산업의 신흥 강자로 빠르게 부상 중이다.
2023년 미·중 갈등으로 글로벌 공급망이 흔들리자, 베트남 정부는 이를 ‘기회의 창’으로 보고 처음으로 국가 차원의 반도체 발전 전략을 세웠다.
2030년까지 100개 이상의 반도체 설계 기업, 소규모 제조공장 1곳, 후공정 패키징 시설 10곳, 전문 인력 5만 명 양성을 목표로 내걸었다.
현재 베트남의 핵심은 ‘후공정’이다.
인텔은 호치민에 세계 최대 규모의 테스트·조립 공장을 운영 중이며, 한국의 암코르는 16억 달러를 투자해 하노이 인근에 첨단 패키징 공장을 완공했다.
이 공장은 삼성전자, 엔비디아 등 글로벌 기업의 부품 수요를 일부 담당하고 있다.
한편, 베트남 토종 IT기업 FPT와 Viettel은 자체 칩을 설계하며 “메이드 인 베트남 반도체”의 첫 발을 내딛었다.
시놉시스(Synopsys), 캐드런트(Cadence) 같은 글로벌 EDA 기업도 다낭과 호치민에 설계센터를 운영하며 현지 엔지니어를 훈련시키고 있다.
이러한 움직임 덕분에 베트남은 단순한 조립공장에서 “설계와 제조가 공존하는 하이브리드 허브”로 발전하고 있다.
미국과의 관계 강화도 주목된다.
2023년 바이든 대통령의 하노이 방문 이후, 미·베트남 관계가 ‘포괄적 전략동반자’로 격상되며 반도체 협력이 핵심 의제로 부상했다.
미국은 CHIPS법 예산 일부를 베트남의 인력 양성과 기술 지원에 투입하기로 했고, 양국은 반도체 훈련센터 설립과 인재 교류를 약속했다.
반면 중국은 베트남을 경쟁 상대로 보고 기술 협력을 제한하고 있어, 베트남은 “미국과의 협력–중국과의 무역”이라는 이중 전략을 택하고 있다.
문제는 인프라와 인력이다.
숙련된 공정 엔지니어가 부족하고, 전력 공급이 불안정하다.
남중국해 분쟁 등 지정학적 위험도 여전히 존재한다.
그러나 베트남은 제조비용이 낮고 정치적 안정성이 높아 글로벌 기업들이 선호한다.
정부의 정책 의지와 젊은 인구의 학습능력까지 더해지면, 2030년쯤 베트남이 동남아의 반도체 중심국으로 자리 잡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오일머니에서 칩머니로, 신흥국들의 도전
사우디와 UAE는 자본과 외교력, 이스라엘은 기술과 혁신, 베트남은 노동력과 제조 효율성을 무기로 삼는다.
이들의 공통점은 반도체를 “국가 안보이자 성장의 엔진”으로 바라본다는 것이다.
차이점은 출발점이다.
사우디·UAE는 ‘돈으로 기술을 사고’, 이스라엘은 ‘두뇌로 시장을 사고’, 베트남은 ‘인력으로 미래를 산다’.
이 신흥 4국의 도전은 지금은 조용하지만, 향후 10년 내 글로벌 공급망의 균형을 뒤흔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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