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세계 반도체 패권 경쟁은 주로 미국과 중국의 각축, 그리고 한국·일본·대만 등 주요 강국들의 행보에 이목이 쏠려 있다. 하지만 그 이면에서 조용히 자기 입지를 다져가는 또 다른 세 강자가 있다. 바로 유럽, 인도, 싱가포르다.
이들 국가는 막대한 자본과 전략으로 무장한 기존 선도국들과는 달리, 각자의 강점을 앞세워 반도체 산업 공급망에서 자신들의 위치를 확보하려 분주히 움직이고 있다.
유럽: 기술 주권을 향한 통합 전략
유럽연합(EU)은 코로나19 기간의 반도체 공급난과 미·중 기술 패권 경쟁을 계기로, 반도체를 기술 주권의 핵심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2023년 발효된 유럽 칩법(European Chips Act)은 EU의 전 세계 반도체 생산 비중을 현재 약 10% 수준에서 2030년까지 20%로 끌어올린다는 야심 찬 목표를 내세운다.
이를 위해 공공·민간을 합쳐 430억 유로 이상의 투자 재원을 마련하고, 공급망 충격에 대응할 수단을 구축하는 등 다양한 지원책을 추진 중이다.
과거 1990년대에는 전 세계 칩 생산의 3분의 1 이상을 차지했던 유럽 반도체 제조업이 지금은 10% 남짓까지 위축됐지만, 이번 칩법을 통해 부흥의 불씨를 되살리려는 시도다.
이 전략의 일환으로 각국 정부는 공격적인 투자 유치에 나섰다. 독일은 인텔의 유럽 진출에 화답하여 약 300억 유로 규모의 첨단 반도체 공장을 유치했고, 그 대가로 100억 유로에 달하는 보조금을 제공했다.
TSMC도 독일 드레스덴에 현지 기업들과 약 100억 유로 규모의 합작 팹 설립을 추진 중이며, EU 차원의 50억 유로 보조금을 승인받았다.
유럽이 강점으로 삼는 분야는 명확하다. 전 세계가 의존하는 노광장비 기업 ASML(네덜란드)을 필두로 반도체 장비, 특수 화학소재, 전력용 반도체 등에서 독보적인 경쟁력을 보유하고 있다.
그러나 최첨단 로직칩 생산역량은 부족하다. 유럽은 여전히 고성능 칩 대부분을 아시아에서 수입하고 있어 제조 주권 측면에서는 취약하다.
지정학적으로는 미국과 공조해 ASML 장비의 대중국 수출을 제한하는 등 전략적 입장을 강화하고 있다. 반면 안보와 무관한 경제 협력은 유지하려는 균형 외교도 병행 중이다.
인도: 새로운 반도체 강국을 향한 도전
인도는 방대한 인구와 급성장하는 디지털 내수시장을 바탕으로 반도체 자립에 뛰어들었다. 2022년부터 ‘메이크 인 인디아’ 전략 아래 약 100억 달러 규모의 반도체 지원 프로그램을 가동했다.
현재까지 10개 이상의 반도체 프로젝트가 승인됐고, 웨이퍼 팹부터 패키징, 화합물 반도체, OSAT까지 다양한 분야의 투자 유치가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초기부터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대표 사례였던 Vedanta-Foxconn 합작 프로젝트는 파트너 이탈로 좌초 위기를 맞았고, 정부는 규제를 완화하며 대체 파트너 확보에 나섰다.
그럼에도 미국 마이크론은 구자라트 지역에 약 27억 달러를 투자해 패키징 공장을 설립하며 인도 진출을 본격화했다. 인도 정부는 이 가운데 70% 가까이를 직접 지원했다.
인도는 제조보다 설계에 더 강점을 가진다. 세계 주요 팹리스와 IDM들이 인도의 R&D 인력을 활용하고 있으며, 전체 반도체 설계 인력의 20% 이상이 인도 출신이다.
정부도 설계 인센티브 프로그램을 운영하며 스타트업 육성과 대학 연계를 강화하고 있다.
지정학적으로는 미국과의 협력을 적극적으로 확대 중이다. 2023년 정상회담을 통해 미국 기업들의 대규모 인도 투자가 이뤄졌고, 일본·EU도 협력에 나섰다.
중국과는 국경 갈등에도 불구하고 공식적인 대립은 피하며 전략적 거리두기를 유지하고 있다. 아직 제조 기술 확보에선 갈 길이 멀지만, 인도는 내수시장과 인재를 무기로 긴 호흡으로 접근 중이다.
싱가포르: 작은 거인의 정밀한 설계
국토가 작고 자원도 부족한 도시국가 싱가포르는 50년 넘는 전략적 산업 육성을 통해 오늘날 아시아 반도체 허브로 부상했다.
현재 전 세계 반도체의 약 10%가 이곳에서 생산되며, 전 세계 반도체 장비의 약 20%가 싱가포르에서 제조된다.
ST마이크로, 글로벌파운드리, 마이크론 등 주요 기업들이 싱가포르에 팹을 운영하고 있고, 소재·기판 분야까지 투자처가 확대되고 있다.
싱가포르 정부는 산업용 부지, 인력, 전력·용수, 조세제도, 행정 속도 등에서 세계 최고 수준의 기업 친화적 환경을 구축해왔다.
2023년에는 글로벌파운드리의 40억 달러 투자로 Fab 7H가 가동됐고, SiC 전력반도체 양산과 고밀도 기판(FC-BGA) 생산 시설도 속속 들어서고 있다.
싱가포르의 강점은 공급망 다변화 시대에 맞춘 정치적 중립성과 신뢰성이다. 미·중 갈등 사이에서 기술 이전과 고부가가치 제조가 가능한 ‘안전한 생산기지’로 평가받고 있다.
2030년까지 제조업 규모를 50% 확대한다는 비전 속에 반도체는 전략 핵심으로 자리 잡았으며, 첨단 패키징과 전력반도체 등 틈새 고부가 영역에서 존재감을 넓히고 있다.
패권의 이면, 조용한 주도권 다툼
유럽, 인도, 싱가포르. 이 세 국가는 완성형 반도체 강국은 아니지만, 그만큼 유연하고 전략적이다. 유럽은 기술 장비를, 인도는 인재와 내수를, 싱가포르는 신뢰와 정밀함을 무기로 삼는다.
이들은 거대한 제조라인이나 메모리 점유율 대신, 자신만의 자리에서 공급망의 핵심 노드를 차지하려 한다.
세계 반도체 패권은 단순한 기술 경쟁이 아니라 외교, 경제, 산업 전략이 결합된 종합전이다. 조용히 그러나 꾸준하게 움직이는 또 다른 3강이 이 전장 한가운데에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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