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칩 안의 두뇌, 세상을 움직이다
1971년 인텔의 ‘4004’ 마이크로프로세서가 세상에 등장했을 때,
사람들은 그것이 “작은 계산기용 부품” 정도라고 여겼다.
그러나 불과 10년 후, 이 손톱만 한 칩은
자동차, 군용기, 은행, 가정용 컴퓨터까지 모든 산업의 중심에 자리 잡는다.
칩 한 개가 회사를 움직이고,
칩 한 세대가 산업의 운명을 바꾸는 시대가 열린 것이다.
하지만 기술이 폭발적으로 발전할수록
새로운 문제가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
칩은 점점 작아지지만, 그 속의 물리적 한계는 점점 커졌다.
■ 고든 무어의 예언 — “18개월마다 두 배로”
1965년, 인텔 공동 창업자 고든 무어(Gordon Moore)는 한 논문을 발표했다.
그는 “집적회로의 트랜지스터 수는 약 18~24개월마다 두 배씩 증가할 것”이라 예측했다.
이 단순한 그래프 하나가 훗날 ‘무어의 법칙(Moore’s Law)’으로 불리게 된다.
처음엔 누구도 믿지 않았다.
하지만 1970년대에 들어서자
반도체 업계는 무어의 법칙을 목표이자 신념으로 삼기 시작했다.
더 작은 트랜지스터, 더 빠른 클럭, 더 적은 비용 —
이 세 가지 목표는 엔지니어들의 ‘성능 3대 원칙’이 되었다.
무어의 법칙은 단순한 관찰이 아니라,
**산업 전체의 진화 속도를 정의한 하나의 “자기실현 예언”**이었다.
■ 미세화의 첫 전쟁 — 마이크로미터에서 나노로
1970년대 초, 반도체 공정은 10마이크로미터(㎛) 수준이었다.
(1㎛ = 1/1000mm)
하지만 인텔과 모토로라, 페어차일드, NEC 등이 경쟁적으로
7㎛ → 5㎛ → 3㎛로 공정을 줄이기 시작했다.
공정이 미세해질수록 한 칩에 더 많은 트랜지스터를 넣을 수 있었고,
성능은 기하급수적으로 향상됐다.
예컨대 인텔 8080(1974)은 6,000개,
8086(1978)은 29,000개 트랜지스터를 내장하며
“개인용 컴퓨터 시대”를 열었다.
하지만 공정이 줄어들수록 문제가 발생했다.
트랜지스터 간의 거리가 가까워지면서 전류 누설(leakage current) 이 증가했고,
회로의 발열과 신호 간섭(crosstalk) 이 심해졌다.
“작게 만들면 무조건 좋다”는 공식이
점점 열과의 싸움으로 변해가던 시기였다.
■ 발열과 전력 — 보이지 않는 적과의 전쟁
트랜지스터는 스위치처럼 전류를 켜고 끄는 역할을 한다.
그런데 수만 개의 스위치가 초당 수백만 번씩 켜지고 꺼지면
그 안에서 막대한 열이 발생한다.
1970년대 후반, CPU의 클럭 속도는 1MHz를 넘어서며 급상승했다.
하지만 속도가 오를수록 발열과 전력 소모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칩이 뜨거워지면 신호 전달이 불안정해지고, 수명이 단축됐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등장한 개념이 CMOS(Complementary Metal-Oxide-Semiconductor) 구조다.
CMOS는 전류가 실제로 흐르는 시간을 최소화하여
발열과 전력 낭비를 크게 줄였다.
이 구조 덕분에 이후 대부분의 CPU와 메모리 칩은 CMOS 방식으로 전환되었다.
즉, 무어의 법칙이 미세화의 속도를 이끌었다면,
CMOS는 그 속도를 “견딜 수 있게 만든 기술적 방패”였다.
■ 포토리소그래피 — 빛으로 회로를 새기다
트랜지스터를 수만, 수십만 개로 늘리려면
정밀한 회로를 미크론 단위로 새겨야 했다.
손으로는 불가능했다.
그래서 등장한 기술이 포토리소그래피(Photolithography).
빛(자외선)을 이용해 회로 패턴을 실리콘 웨이퍼에 새기는 방식이다.
빛의 파장이 짧을수록 더 미세한 회로를 만들 수 있었기 때문에,
업계는 점점 더 짧은 파장의 빛을 찾았다.
이 과정이 훗날 EUV(극자외선) 시대로 이어진다.
70~80년대 포토리소그래피의 발전은
단순히 ‘생산 기술’이 아니라 트랜지스터 수의 한계를 깨는 열쇠였다.
■ DRAM과 메모리의 탄생 — 저장의 혁명
무어의 법칙은 CPU만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1970년대 초, 인텔은 CPU와 함께
세계 최초의 DRAM(동적 랜덤 액세스 메모리) Intel 1103을 출시했다.
이 작은 칩은 단 1킬로 비트(1024비트)의 용량이었지만,
기존 자기코어 메모리를 완전히 대체했다.
저장 장치의 소형화가 가능해지면서
컴퓨터는 “데스크톱 위의 기기”로 진입할 수 있었다.
이후 DRAM 기술은 일본 기업들에 의해 폭발적으로 발전한다.
히타치·NEC·도시바가 인텔을 추월하며
‘메모리 강국 일본’이라는 시대를 열었다.
■ 일본의 질주, 미국의 대응
1980년대 초, 일본 반도체 기업들은
높은 품질과 정밀한 생산 기술로 미국을 압도했다.
그들은 ‘저불량·고효율’ 제조를 무기로
메모리 시장의 80% 이상을 장악했다.
미국은 충격에 빠졌다.
이에 대응하기 위해
미 정부와 인텔, AMD, 모토로라 등이 힘을 모아
SEMI, SEMATECH 같은 공동 연구 컨소시엄을 만들었다.
이들이 바로 훗날 EUV 장비와 첨단공정의 토대를 마련한 주역들이다.
즉, 기술 경쟁이 국가 단위의 산업 전쟁으로 확대된 시기였다.
■ 미세화의 부작용 — 복잡성의 폭발
공정이 작아질수록 엔지니어들의 문제는 단순히 “작게 만드는 것”이 아니었다.
회로의 복잡성이 폭발하면서 설계·검증·테스트 비용이 급증했다.
수백만 개의 트랜지스터를 일일이 설계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이때 등장한 것이 EDA(Electronic Design Automation),
즉 반도체 설계 자동화 소프트웨어다.
EDA 덕분에 사람의 손이 아닌 컴퓨터가 회로 설계를 도와주면서
복잡성의 벽을 어느 정도 완화할 수 있었다.
결국, 반도체 산업은
“물리적 기술 + 소프트웨어적 설계”의 융합 산업으로 진화하기 시작했다.
■ 발열, 비용, 복잡성 — 세 가지 벽
1980년대 중반, 반도체 산업은 세 가지 벽에 부딪혔다.
발열 – 클럭 속도 증가로 인한 과열
비용 – 첨단공정 장비 가격의 폭등
복잡 – 설계와 검증의 한계
이 벽을 넘기 위해선 단순한 미세화가 아니라
구조의 혁신이 필요했다.
그리고 이 혁신은 1990년대 초,
‘RISC 아키텍처’와 ‘파운드리 모델’이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이어진다.
■ 마무리 — 속도의 시대, 그리고 그 대가
무어의 법칙은 인류가 기술로 시간을 앞당긴 이야기다.
트랜지스터 수는 폭발적으로 늘었고,
칩의 성능은 수십만 배 향상됐다.
하지만 그 대가는 열, 복잡성, 그리고 자본의 집중이었다.
이 시기를 지나며 반도체는
‘개인의 발명품’이 아닌 ‘국가 전략 산업’으로 변했다.
“트랜지스터의 수는 두 배가 되었지만,
그만큼 해결해야 할 문제도 두 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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