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MD의 역사는 언제나 거인의 그림자 속에서 시작됐다.
인텔이 시장을 지배하던 시절, AMD는 늘 ‘대체품’ 혹은 ‘가성비 브랜드’로 불렸다.
하지만 세상이 예상치 못한 시점에, 그 ‘조연’이 무대의 중심으로 걸어 나왔다.
이것은 화려한 혁신의 이야기가 아니라, 버티고 살아남은 자의 이야기다.
추격자에서 생존자로
1970년대 초, AMD는 인텔의 호환 칩을 만드는 작은 회사였다.
인텔이 만든 CPU를 복제해 좀 더 싸게 파는 전략으로 시작했지만,
1990년대에 인텔이 독자적인 기술을 개발하며 치고 나가자,
AMD는 “복제만으로는 살아남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2000년대 들어 AMD는 연속된 적자와 인력 유출로 위기에 빠졌다.
주가는 2달러 아래로 떨어졌고, 업계는 “AMD는 끝났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 위기 속에서 등장한 한 인물이 회사를 구했다.
리사 수의 등장 ― 기술보다 현실을 본 리더
2014년, MIT 출신 반도체 공학자 리사 수(Lisa Su) 가 CEO로 취임했다.
그녀가 회사를 맡았을 때 AMD는 기술력도 자금도 모두 인텔에 밀리고 있었다.
그녀가 내린 첫 결정은 의외였다.
“모든 걸 다 잘하려 하지 말자.
우리가 잘할 수 있는 분야에 집중하자.”
리사 수는 과감히 사업 포트폴리오를 절반으로 줄였다.
메모리, 모바일 칩, 일부 그래픽 부문을 정리하고
CPU와 GPU, 단 두 가지 축에 모든 자원을 집중했다.
AMD의 생존 전략은 ‘확장’이 아니라 ‘선택’이었다.
효율의 철학 ― “더 빨리”가 아닌 “더 똑똑하게”
AMD의 부활은 ‘효율’에서 시작됐다.
리사 수는 경쟁사처럼 거대한 공장을 짓는 대신,
TSMC 같은 파운드리(외부 제조사)와 협력해 설계에만 집중했다.
그 덕분에 AMD는 설비 투자 부담을 줄이고,
작은 조직으로도 기술 혁신을 지속할 수 있었다.
이 전략이 만들어낸 결과가 바로 Zen 아키텍처(2017) 다.
Zen은 칩을 여러 개의 작은 블록(Chiplet)으로 나눠 조립하는 구조로,
생산 효율은 높이고 발열과 전력 낭비를 최소화했다.
AMD는 더 이상 ‘가성비 CPU’가 아니라,
구조적으로 똑똑한 CPU를 만드는 회사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느리지만 단단한 반등
AMD는 2010년대 후반부터 꾸준히 인텔을 추격하기 시작했다.
서버용 EPYC, 일반 소비자용 Ryzen 시리즈는
성능과 효율 면에서 인텔의 제품을 위협했다.
특히 Ryzen 7 7800X3D와 Ryzen 9 9800X3D는
AMD의 효율 철학이 가장 잘 드러나는 대표 제품이다.
두 제품 모두 3D V-Cache 기술을 탑재해
적은 전력으로도 높은 게임 성능을 낸다.
이 덕분에 “게이밍 최적 CPU”라는 평가를 받으며
PC 게이머 사이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다.
한편 GPU 라인업에서는 Radeon RX 9000 시리즈가
‘가성비 그래픽카드’로 주목받고 있다.
성능 면에서는 NVIDIA의 플래그십보다는 한 단계 낮지만,
비슷한 수준의 그래픽 품질을 훨씬 낮은 가격에 제공한다.
AMD의 효율적 설계가 소비자에게 “현명한 대안”으로 인식된 것이다.
이처럼 AMD의 제품 인기는 단순한 성능 경쟁이 아니라,
‘필요한 만큼의 성능을 가장 합리적으로 제공하는 기술’ 덕분이다.
AMD는 ‘최고를 위한 칩’이 아니라, ‘현실을 위한 칩’을 만든다.
효율이 만든 철학
리사 수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세상을 바꾸려는 회사가 아니다.
다만 세상이 더 오래 돌아가게 만드는 회사다.”
그녀의 리더십은 혁신보다 지속 가능성에 가깝다.
AMD의 기술은 ‘화려한 신제품’보다는
‘불필요한 낭비를 제거한 합리적인 설계’를 지향한다.
Zen, EPYC, Ryzen, Radeon —
이 모든 제품의 공통점은 적은 자원으로 더 큰 성능을 내는 것이다.
AMD는 기술보다 철학으로, 규모보다 효율로 살아남았다.
1위보다 오래 가는 2위의 전략
AMD는 여전히 인텔과 엔비디아의 뒤에 있다.
하지만 그 ‘2위’라는 위치는 열세가 아니라 전략이다.
CPU에서는 인텔을, GPU에서는 엔비디아를 추격하며
모든 시장에서 빠르게 1위를 따라잡는 회사.
AMD는 한 곳에 집중해 왕좌를 노리는 기업이 아니라,
여러 전장에서 효율적으로 생존하는 현실적 제국이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승리가 아니라 생존이다.
그리고 그 생존의 철학이 결국 AMD를 오늘의 위치로 이끌었다.
AMD는 스스로를 ‘혁신 기업’이라 부르지 않는다.
그 대신 “균형을 유지하는 기업”,
즉, 인텔과 엔비디아 사이에서 기술 생태계의 중심을 붙잡는
보이지 않는 조정자 역할을 자처한다.
이 중간자적 위치 덕분에 AMD는 한쪽이 무너지면 대체재로,
양쪽이 경쟁하면 균형추로 작용하며
산업 전체를 유연하게 움직이는 ‘조정자형 리더’로 성장했다.
결론 ― 혁신보다 오래 가는 기술
AMD의 이야기는 화려한 기술 쇼케이스가 아니다.
그것은 “무너져도 다시 일어나는 기업의 구조”에 관한 이야기다.
리사 수가 보여준 것은 천재적 발명보다
냉정한 판단, 효율의 철학, 그리고 꾸준히 버티는 태도다.
“천재적인 혁신보다, 버티는 효율이 더 강하다.”
AMD는 바로 그 철학으로
세상의 두뇌 시장에서 가장 현실적인 경쟁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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